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열황후 감씨 (문단 편집) == 정사 == 유비는 감부인이나 미부인과 결혼하기 전에 앞서 맞이한 처자가 여럿 있었다. 197년, 유비가 원술을 치러 간 사이 [[조표(삼국지)|조표]]가 끌어들인 여포가 하비를 빼앗고 유비의 처자식을 붙잡았다. 이에 미축은 유비에게 자신의 여동생 [[미부인]]을 시집보냈다. (미축전) 이후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해서 자신의 처자를 도로 되찾았다. 유비와 여포의 사이가 다시 나빠지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유비를 격파했고 또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붙잡힌 유비의 처자는 여포가 격파되고나서 다시 유비의 품으로 돌아갔다. (선주전) 유비가 예주에 부임하던 시기[* 도겸에게 예주자사로 천거받은 시점으로 볼 수도 있다. 시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탓에 정확히 언제 혼인했는지 알 수 없다.]에 감부인을 새로이 첩으로 맞이했다. (감황후전) 이후 조조가 관우가 지키던 서주를 빼앗으면서 유비의 처자는 또 붙잡히게 되었다. (선주전) 여기서 감부인은 유비의 곁에 있었던 덕분에 조조에게 잡히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감부인도 조조에게 사로잡혔지만 관우가 조조군에서 유비에게로 돌아올 때 같이 데리고 와준 것인지 나와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유비가 조조군과 교전한 후에 곧장 북으로 튀었고 유비의 처자들이 다 잡혔다는 걸 생각하면 후자쪽에 가까울듯 하다.] 유비는 본처를 여러 차례 잃었기 때문에 감부인이 항상 집안일을 관리했다. (감황후전) 이 구절은 유비에게 감부인, 미부인 뿐만 아니라 이전에 처자가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감부인은 유비를 따라 형주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 유선을 낳았다. 유비군은 [[장판파]]에서 조조군에게 추격당하게 되었는데 유비는 위급한 나머지 감부인과 유선까지 매정하게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조운이 감부인과 유선을 구출해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감황후전) 209년,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210년, 유비군이 남군을 얻었다. (자치통감) 감부인은 죽고나서 남군에 매장되었다. (감황후전) 유비는 감부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손부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감부인은 유비군이 남군을 얻은 이후에 죽어서 남군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관우가 패배하여 형주를 상실한 이후, 222년, 감부인의 시호를 황사부인(皇思夫人)으로 추증했고 감부인의 영구를 촉으로 이장하던 도중 유비가 병사했다. 제갈량은 상서를 올려 유선의 허락을 받아 감부인을 소열황후(昭烈皇后)로 추증하고 유비와 성도의 혜릉에 합장시켰다. (감황후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